책소개
이 책에 실린 <메아리>(1960), <백발 급구>(1968), <타인의 심장>(1968), <성공의 절정>(1970)은 단편소설 작가로서의 유리 나기빈의 특징이 잘 드러난 그의 대표작들이다.
<메아리>는 자전적 주인공이 ‘세료자’가 등장하는 ‘자전적 서클’에 포함되는 소설이다. 어린 시절 휴양지에서 만난 소녀와의 짧고도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시네고리야의 해변에서 돌을 수집하던 외톨이 주인공 세료자는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있던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녀 비카와 만나게 된다. 작품의 반전은 맨 마지막에 일어난다. 단편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들에게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며 예기치 못한 작품 전개의 굴곡을 만들어내고 있다.
<백발 급구>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건축물들에 대한 작가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건축물 사진첩들을 뒤적이며 소일하는 것을 위로 삼아 부정한 아내와의 원만치 못한 결혼 생활을 견뎌가고 있는 주인공 구신은 페테르부르크 출장 중에 렌필름 영화사 앞에서 이류 배우 나타샤와 만나게 된다. 사출 전문가라는 특이한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페테르부르크의 유명 건축물들을 건설한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와 삶의 깊이를 가진 구신의 매력에 빠져든 나타샤는 구신과 보낸 이틀을 잊지 못하게 된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구신도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되고 모스크바의 생활을 정리하고 페테르부르크의 나타샤에게로 되돌아가게 되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성공의 절정>은 ‘현대적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암 치료를 위한 획기적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의학자 가이는 성공의 절정에서 아내 레나의 가출로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결국 아내의 사랑이 자신의 삶에 어떤 비중을 차지했던가를 실감하게 되고 그 상실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타인의 심장>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다룬 작품이다. 타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주인공 코스트로프는 퇴원 후 자신의 행동 방식에 의문을 갖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낯섦을 느끼며 스스로에게도 전혀 생소한 체험들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되지만 어머니와 아내에게 성실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지하철에서 자신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알아본, 자신에게 심장을 이식해 준 아이의 엄마 앞에서 쓰러지게 된다. 아이의 엄마도 낯선 청년의 모습 속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자신의 아들 모습을 보고 그에게로 발길을 돌리는 환상적 결말로 끝이 난다.
200자평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유리 나기빈의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 예술에 대한 깊이,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철학적 사고의 폭을 느낄 수 있다. <메아리>, <백발 급구>, <성공의 절정>은 모두 ‘사랑의 테마’를 다루고 있으며, <타인의 심장>은 1960년대에는 획기적인 소재인 ‘인류 최초로 인간의 심장을 이식받은 청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메아리>와 <백발 급구>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지은이
유리 나기빈(Юрий М. Нагибин, 1920∼1994)은 다방면에 걸쳐서 창조적 열의를 발산한 만능 창작인이었다. 삶과 조우한 경험들을 날것 그대로 직접적으로 드러낸 에세이스트였으며, 삶의 여러 모습을 생생한 문학적 대화로 형상화해서 우리 시대를 선도하는 문화산업에 접목시킨 시나리오 작가였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객관적 이성을 바탕으로 냉정하고 꼼꼼하게 작품들을 읽어내는 평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평론가는 뛰어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문학계의 속설을 스스로의 존재로 반박한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리 나기빈이 주목했던 장르는 단편소설이었다.
옮긴이
김은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 ‘20세기 러시아 문학사’과에서 러시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선문대학교 노어과에 출강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유리 나기빈의 단편들에 나타난 사랑의 테마 연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작품들에 나타난 서사 구조 연구>, <‘에고’에 나타난 서술 형식과 솔제니친의 역사인식> 등이 있다. 주요 연구는 20세기 러시아 문학 작품들의 연구, 러시아 미술과 문학 텍스트의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 등이다. 2007년 6월 월간 ≪에세이플러스≫에 러시아 미술에 관련된 에세이 <어디나 삶>을 발표하면서 수필가로 등단했다. 현재 여러 수필 잡지에 러시아 미술과 러시아 문학 작품에 대한 에세이를 게재 중이며, 러시아 문학에 대한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메아리
백발 급구
타인의 심장
성공의 절정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버스는 무겁게 내려앉으면서 시네고리야의 경계인 시냇물을 지나는 목조 다리로 들어섰다. 나는 멈추어 섰다. 다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온통 흔들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비치카의 회청색 머리카락과 햇볕에 탄 가느다란 팔꿈치가 창문에 다시 나타났다. 비치카는 내게 신호를 했고 시냇물 건너로 힘껏 동전을 던졌다. 공중에서 반짝이던 그것은 내 발아래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말이 있었다. 여기에 동전을 던지면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